디지털 전환 흐름 반영… 1년에 1초 더하거나 빼는 ‘윤초’ 사라진다 “
윤초(閏秒)의 시간이 끝난다.”
지난달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도량형총회(CGPM)1 에서 2035년까지 윤초를 폐지하는 방안이 합의됐다. 이번 합의에 따라 윤초가 사라지면 2035년 이후에는 지구의 자전 주기를 정교하게 측정한 ‘천문시(UT1)’와 세계적 시간의 표준에 해당하는 세계협정시(UTC2, 원자시)는 1초 이상 차이가 나게 된다.
글 박정연(동아사이언스 기자)
지구 자전 주기와 표준시간의 차이 보정하는 윤초 윤초는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실제 지구의 자전 주기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특정 시각에 1초를 더하거나 빼는 제도다. 달력과 실제 계절과의 차이를 조절하기 위한 ‘윤달’은 일상 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반면 윤초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윤달이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과 실제 계절 간의 차이를 보정하기 위해 쓰인다면, 윤초는 일정하지 않은 지구의 자전 주기로 인해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시간과 실제 시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보정하기 위해 도입됐다. 즉, 지구가 회전하는 시간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만든 일종의 장치다. 윤초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67년이다. 당시 과학자들은 세슘-133 원자의 진(91억 9,263만 1,770번)을 1초로 정했다. 바로 ‘원자시’다. 원자시를 기준으로 하면 하루는 8만 6,400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자시는 실제 지구의 자전속도와는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지구의 자전주기는 바다나 지구 속 마그마 등의 영향으로 빨라지거나 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구의 자전은 달이 바닷물을 밀거나 끌어당기는 힘의 방해를 받아 속도가 감소한다. 지구가 하루에 도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또 화산이나 지진은 지구가 회전운동을 유지하려는 정도를 변화시켜 자전 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화산이 폭발하거나 땅이 흔들리면서 지구의 질량 분포가 특정 지역으로 쏠리게 되면 자전 속도가 빨라지며, 반대로 느려질 수도 있다. 이러한 자연현상에 의해 생겨난 원자시와 지구 자전속도 간의 차이는 하루 약 0.02초 정도다. 이 차이가 쌓여 원자시와 지구 자전속도의 차이가 0.9초 이상으로 벌어지면 1초의 윤초를 넣어 시간을 맞추게 된다. 윤초는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총 27차례 시행됐다. 모두 1초를 더하는 양의 윤초가 적용됐으며 1초를 빼는 음의 윤초가 적용된 적은 없다.
IT 기술 발달하며 윤초 영향 커져
윤초는 그동안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특히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2000년대 초~중반에는 거의 체감할 수 없었다.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2000년대에도 윤초가 적용된 적은 2005년과 2008년 두 번뿐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보통신(IT) 기술이 정교화되면서 윤초가 미치는 영향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2010년 이후 윤초는 2012년, 2015년, 2017년, 2018년 총 4번 추가됐는데 그때마다 산업계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윤초는 정확한 시간이 관건인 정보통신(IT), 향공, 금융 분야에선 위협적인 요소다. 윤초에 대비하기 위해선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수정하고 관련 시스템을 사전에 정비해야 하는데 여기에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재에도 윤초 적용을 앞둔 대형 기업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특히 윤초를 일으키는 원인인 화산폭발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는 사전에 예측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어 대비할 시간이 언제나 부족하다. 실제 윤초가 중대한 시스템 오류를 일으킨 사례도 있다. 2012년 호주 항공사 ‘콴타스’는 윤초가 추가되는 것에 대비해 시스템을 급하게 수정했지만 이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해 발권 시스템이 모두 중단됐다. 항공기 400여 편의 출발이 불발됐고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같은 해 미국 온라인 사이트 ‘레딧’은 윤초를 적용한 직후 홈페이지가 완전히 마비됐다. 2016년 보안 업체 ‘클라우드 플레어’는 윤초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홈페이지의 IP주소와 영문 주소를 연결해주는 도메인 시스템에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1초’가 실생활의 불편함으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CGPM, 폐지 주장 과학·산업기술계 손 들어줘
이러한 피해사례가 보고되면서 일찍이 세계 각국에선 윤초를 폐지하자는 여론이 일었었다. 미국, 호주, 프랑스, 독일 등 특히 과학기술이 발달한 나라를 중심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윤초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윤초가 한번 시스템 오류를 일으키면 이로 인한 피해가 막대하다는 것이다. IT 업계 또한 윤초를 예상하기 위한 지구의 자전주기 변수 예측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윤초를 적용하기 위해선 복잡한 작업을 거쳐야 한다며 폐지를 촉구해왔다.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META)는 “윤초를 적용할 때마다 아주 드물게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으며 구글도 오랫동안 윤초의 폐지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윤초의 폐지를 주장해야 한다는 의견에 맞서는 입장도 있다. 2015년 스위스 제나바에서 열린 세계전파통신회의(WCR)에서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13개국과 아프리카 19개국이 윤초 폐지를 지지했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러시아, 아랍연맹, 영국 및 아프리카 10개국 등이 윤초 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윤초 폐지에 반대한 국가들은 주로 위성항법이 발달한 나라들이다. 윤초 시스템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위성항법을 사용하는 나라들은 윤초가 폐지될 시 대대적인 시스템 수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위성항법시스템(GLONASS)은 윤초를 기준으로 운영 중이다. 또 영국의 경우 윤초를 반영하는 세계협정시(UTC)를 운영하는 주체인 그리니치 천문대의 상징성 때문에 폐지에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이처럼 과학계, 산업계 그리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들며 윤초를 둘러싼 논란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못했다. 이번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이뤄진 합의는 이처럼 복잡한 갈등을 딛고 과학과 산업기술의 손을 들어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합의에는 기존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영국이 긍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초가 야기하는 디지털 혼란이 예전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됐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국제도량형국(BIPM) 책임자인 패트리지아 타벨라 박사는 이번 합의에 대해 “역사적인 결정”이라며 “불규칙적인 윤초에 의해 야기되는 지금과 같은 불연속성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윤초가 폐지되기까지는 남은 과제가 있다. 유다 레비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 연구원은 “이번 결의안을 바탕으로 윤초를 폐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정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