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사람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법과 제도는 공동체의 안정성과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합니다. 이로 인해 기술과 제도 사이에는 필연적인 시차가 발생하게 됩니다. 정부는 이러한 시차를 극복하고자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 : 에너지정책지원팀 허재성 매니저

기술과 제도의 시차 극복을 위해
‘샌드박스(Sandbox)’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모래 놀이터를 뜻하며, 규제 샌드박스는 신기술을 활용한 제품이나 서비스가 일정한 조건(기간, 장소, 규모 등) 하에 기존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받으며 실증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입니다. 2016년 영국에서 처음 시행된 이후 현재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약 60여 개국에서 운영 중입니다.

규제 샌드박스의 형태와 절차
규제 샌드박스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됩니다.

① 규제 신속확인 : 인허가 필요 여부나 규제 적용 여부를 관계부처를 통해 신속히 확인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② 실증특례 : 일정 기간(최초 2년, 최대 2년 연장 가능) 동안 특정 지역과 규모 내에서 규제를 일시적으로 면제하거나 유예해 실증 기회를 제공합니다.
③ 임시허가 : 안전성이 검증된 신제품·서비스에 대해 규제 적용을 유예하여 시장 출시를 앞당길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이러한 제도들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금융위원회 등 다양한 정부 부처 소관입니다. 신청자는 먼저 해당 부처의 담당자와 사전 상담을 진행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술·서비스가 규제 대상인지, 실증특례나 임시허가 신청이 가능한지를 확인한 뒤 신청서와 관련 서류를 규제 샌드박스 포털에 제출합니다. 이후 관계부처와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최종적으로 규제 샌드박스 적용 여부가 결정됩니다.

정유업계의 대표적 사례
정유업계에서 주목할 만한 대표 사례는 ‘폐플라스틱 열분해유의 정제원료화’입니다. 기후위기와 환경문제가 심화되며 전 세계적으로 재활용 기술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폐플라스틱을 원유와 혼합해 정제하는 기술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소각하거나 매립하던 폐플라스틱을 열분해 과정을 통해 액체 형태의 원료로 전환하고 이를 원유처럼 정제시설에 투입함으로써 자원으로 다시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법적으로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는 ‘석유류’로 인정되지 않았기에 정유 공장에 투입하거나 정제 과정을 시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2021년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폐플라스틱 열분해유에 대한 실증특례가 부여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정유사들이 열분해유를 구매해 원유와 혼합하여 정제 공정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2024년 석유사업법 제2조에 ‘친환경 정제원료’ 조항이 신설되면서 해당 원료를 정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수립되었습니다. 정부와 민간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폐플라스틱 열분해유의 구매 및 활용 기반이 마련되어 플라스틱 폐기물 감축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습니다. 정유회사들은 열분해유를 석유제품 정제에 적용함으로써 자원 순환과 탄소중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술 패권 시대의 핵심 제도
앞으로도 새로운 산업의 물결은 끊임없이 기업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 물결에 휘청거릴지, 아니면 파도를 타고 도약할지는 기업의 준비와 제도적 뒷받침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규제 샌드박스는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 우리 기업이 흐름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돕는 핵심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신기술 도입을 촉진하고 기업의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규제 샌드박스가 앞으로 더욱 활발히 운영되기를 기대합니다.